선거 관련 기사를 읽다가, 재밌는 블로그글 하나 발견.
http://indizio.blog.me/30135689165
정치 허무론자는 되고싶지 않으나 한숨이 나오는 건 어쩔수 없다.
내 선거구는 강남을. 아프리카 다녀온 다음날 시차에 쩔어 선거구위원도 확인하지 않고 재외국민투표소 달려갔는데 이게 왠일, 우리동네 격전지란다. 한미통상교섭본부장 김종훈과 거물 정동영.
http://news.hankooki.com/lpage/politics/201204/h2012040302405721000.htm
세상에 이런 흥미진진한 일이 강남을에서 벌어지다니. 강남을 선거는 원래 지독히도 재미없는 동네다. 지역구의원이야 뻔하고, 정당투표나 하러 가는 동네인데... 둘다 욕하는 글을 세장씩은 쓸 수 있을 것 같다. 허울뿐인 정동영 비판은 차치하고 FTA만 논의해도 할말은 많다.
여기서 급속도로 보수꼴통이 되어가고 있는 나는 사실 한미 FTA 그 자체는 찬성한다. FTA가 좋아서가 아니라 한국이 글로벌 경제에서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안이 별로 없다고 믿다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는 작은 국가 한국이 노라고 거절할 수 있는 흐름이 아니기에 이왕 이동네서 살거 잘사는게낫다고 생각하는 거다.
문제는 그걸 어떻게 구현했냐는 것. 그렇게 글로벌 경제로 포지셔닝 할거면 외교하나는 진짜 잘해야한다.
사회적 안전망에 관한 논쟁은 사실 아프리카의 경제발전 모델을 어떻게 가져가야하는 논쟁하고 크게 다르지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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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재외국민 투표 갔다온날 몇줄 쓰다말고 선거 결과 보고 더이상 쓸 의욕을 잃음.
한동안 한국이 굉장히 그리웠는데 먼가 다시 한국이 지긋지긋하게 느껴졌다.
좋은 글 몇개 공유 :
1. My Cahier
http://www.mycahier.com/
벌써 오육년됐나, 주인장 KBS 신입 기자 시절부터 꾸준히 보고 있었는데 요즘에는 많이 예민해진게 보인다. 힘들게 파업중이신것 같던데, 힘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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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이런 생각은 든다. 진보 진영에서 횡행하는 이른바 '진영의 논리'와 '이중 잣대'를 줄기차게 질타해온 진보적 지식인들이 김용민을 두고선 '사퇴까지는 안 해도 된다'고 말하는 풍경을, 나는 좀 우스꽝스럽게 받아들인다. 보수 진영에 적용하는 엄격하고 원칙적인 잣대, 그러나 우리 진영에 적용하는 느슨하고 상황논리적 잣대. 이것을 표나게 꼬집어온 지식인들이라면 적어도 이번 사태에 대해선 사퇴를 요구하는 게 일관성이 있어 보인다. 간단한 질문을 해봐도 좋다. 그들 지식인이 그동안 단골 메뉴로 사용해온 가정형의 문장. 만약 김용민이 새누리당 후보라 해도 우리는 사퇴를 요구하지 않을 수 있는가? 역시 선거철은 사람들을 초조하게 만들고 혼란스럽게 만드는 걸까. 그들의 비일관성은 이렇게 국면적인 특수성으로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우리는 나꼼수의 김용민이 방송에서 늘 '좆'을 입에 달고 살았다 해도 그걸 갖고 사퇴를 요구한 적은 한번도 없다. 사퇴라니. 욕 한번 한 적도 없다. 주지하다시피 문제는 김용민의 과거 막말이 가진 경박성이 아니라 폭력성이다. 위에서 말한 논객들의 면면을 보면, 경박성과 폭력성을 논리적 차원에서 혼동할 만큼 수준 이하의 사람들은 없는 것 같다. 그들의 글도 막말의 정치적 폭력성을 정확하게 짚고 있다. 어쩌면 그들의 너그러움은 논리적 귀결이라기보다는 어떤 정서적 귀결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그래서 든다. 김용민의 막말은 논리적 층위에선 누구나 폭력성으로 범주화하지만, 정서적 층위에선 알게 모르게 경박성으로 인식되는 측면이 생기는 것 같다. 나만 해도 그랬다. 김용민 막말 보도를 처음 접했을 때 나왔던 첫 반응은 "어이쿠, 천하의 김구라랑 인터넷 방송했다면 다 그 정도 막말이 나오는 거 아냐?"였다. 나도 순간적으로 너그러웠던 것이다. 그 너그러움은 막말을 논리적 층위에서 정치적 폭력성으로 범주화하기 이전에, 정서적 층위에서 경박함 정도로만 받아들였던 사실에서 비롯했다.
(중략)
하기야 김용민이나 문대성은 억울한(?) 사례이기도 하겠다. 자기 비하적인 표현인지도 모르겠지만 우리 정치가 보여주는 대부분의 풍경들은 너무나 전형적으로 '제3세계적'이다. 후보는커녕 정치계에 발을 들여놓을 수도 없었을 사람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는 것도 그렇고, 온갖 패악질을 한 그가 이렇게 별탈 없이 직무를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도 철저히 제3세계적 정치 풍경이다. 현직 대통령이 정적인 전직 대통령 일가를 찍어 보복-표적 수사를 진행하는 것도 그렇고, 거기에 타격을 입은 그이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는 것도 너무도 제3세계적 정치 드라마다. 과거 발전주의 시절 장기 집권했던 군부 독재자의 딸이 차기 대통령 여론조사에서 수위를 고수하고 있는 것, 그이를 맞상대하는 후보 역시 누군가의 죽음과 추모 정서에 정치적 밑둥을 놓고 있다는 사실도 제3세계적이다. 돈 많이 벌고 점잖은 이른바 '엘리트 사업가'가 홀연히 나타나 차기 정치 지도자로 각광받는 것도 너무나 제3세계적이다. 나는 이런 모든 풍경들이 얼마쯤 창피하고 수치스럽다.
2. 진중권 등이 만든 팀블로그 litmus
이정희 사퇴에 관한 진중권, 한윤형, 박권일 등의 논쟁은 일련의 글은 진보 정당이 어떻게 행동해야되는가에 대한 고민을 하게 만든다.글은 다 반진중권이 옳다.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진보 정당이 되었고, 청소노동자 김순자 여사 비례대표 1번의 진보신당은 한국사회 어딘가에 꼭 필요한 실험이다. 정당정치란 사회의 다양한 시각을 담아내기 위해 만들어진 시스템이라 믿고, 다양한 시각의 정당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기에 나는 기꺼이 249,995명 중에 한명이 되었다.
그러나 정치는 근본적으로 똥통이다. 아니, 다시 쓰자. 우리는 현실 사회에 살고 있다. 사회에영향을 끼치고 바꾸어 가기위해서는 어느정도의 희생을 가져가고,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정치는 현실에 존재하는 시스템이지, 철학 소설이 아니다. 야권연대 없이 정권 교체는 불가능하다는 게 어제의 교훈. 내가 틀렸다.
(게다가, 나는 경제 정책에서는 상당 부분 신자유주의를 믿기 시작했다. )
아래 글은 다 동의하고 다 재밌는데 결론만 다르다. 김용민은 사퇴를 했어야했고 진보신당이든 통민당은 머든 야권연대는 생각보다 훨씬 중요하고 긴박한 과제다. Ides of March 라는 영화도 추천. 정치세계가 재밌는데다 조지클루니까지 나온다.
http://blog.ohmynews.com/litmus/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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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열거한 복마전의 끝에 김용민의 막말 발언이 터져 나왔다. 2004년 한 인터넷 방송에서 “유영철을 풀어 가지고 부시, 럼즈펠드, 라이스는 아예 강간을 해서 죽이는 거예요”라고 말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 발언 자체보다 저런 말을 해도 웃고 넘길 수 있는 스튜디오 내부의 공기가 더 오싹했다. 당초 방어적으로 대처하던 김용민은 문제가 커지자 트위터와 동영상 메시지를 통해 사과했다. 트위터에서의 사과는 ‘과거에 했던 개그나 연기라 해도”라는 단서를 붙여 다소 미온적인 인상을 남겼으나, 동영상을 통해서는 모두 짊어지고 가겠다는 모습을 보였다.
나는 이 문제로 김용민이 후보 사퇴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비교적 발 빠른 사과가 있었으니 결과로 책임지면 될 일이다. 문제는 야권연대 내부로부터 발화된 김용민을 옹호하는 논리들이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김용민의 발언에 대해 “끝까지 들어봐도 별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선거를 앞두고 이루어지는 흑색 비난일 뿐이라며 “김용민을 끌어 내리려는 정치 알바들의 공세”라는 사람도 있었다. 김용민의 지인으로 보이는 탁현민이라는 트위터 사용자는 “오늘까지 이어지는 새대가리당의 찬란한 성희롱의 역사에 비하면 김용민의 발언은 집회하다 교통신호 어긴 것 쯤 된다. 낮에 본 트윗처럼 그가 한 말이 성희롱이라면 전두환을 살인마라고 하면 노인학대고 이명박을 쥐새끼라고 하면 동물학대다”라고 쓰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인용한 글은 이들의 논리를 명쾌하게 함축한다. 이들에게는 1) (이명박 정권이라는)거악이 있다. 2) 거악에 대항하고 이를 심판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이든 동원될 수 있고, 그 수단이 아무리 폭력적인 것일지라도 거악이 행사하는 폭력과 비교해보면 유의미하지 않다. 즉, 이것은 성전이다. 3) 이들의 폭력을 비판해 당위를 희석시키는 모든 종류의 지적은 악의적이며, 그것을 입 밖에 뱉는 순간 우리 편이 아니다.
이건 자경단의 논리다. 그들의 당위는 거악의 존재 자체로부터 수혈받는 것이다. 옳은 편에 종사하고 있다는 자신감이 신앙화되었을 때나 가능한 합리화다. 그런 맥락에서 성전을 수행하는 탈레반의 논리이기도 하다.
옳은 편에 종사하고 있다는 자신감과 당위는 야권연대를 움직이는 동력의 근간이다. 궁극적으로 옳은 일이기 때문에 다소간의 이견이 있더라도 퉁쳐서 진영논리를 채택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정치에 있어서 연대는 필연적이다. 정치사의 수많은 장면들이 그렇게 만들어져왔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다소간의 이견’인가에 관해 우리는 한 번 더 생각해봐야만 한다. 한계를 명백히 알면서도 절충된 구호에 만족하는 것, 내가 행사할 한 표가 죽은 표로 전락할까봐 실제 내 의견과 계급 정체성을 대변하는 정당을 지지하지 못하는 야권연대가 과연 스스로의 이상을 실현하는데 도움이 될 것인지에 관해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이쯤에서 영화 한 편을 들여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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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니콜스의 <프라이머리 컬러스>는 대선을 앞둔 민주당 경선 과정을 그린다. 존 트라볼타가 연기하는 주지사는 이제 막 경선 후보로 참가했다(클링턴을 모티브로 한 캐릭터다). 그는 교육 문제에 특히 관심이 많은 개혁 성향의 정치인이다. 예측 불가하고 경박한 면이 있지만 바로 그런 인간적인 매력 덕분에 그를 싫어하는 유권자마저도 실제 만나고 난 뒤에는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의 곁에는 냉철한 아내가 있다(역시 힐러리를 모티브로 한 캐릭터다). 그녀는 오랫동안 그의 정치적 동지이자 후원자였다.
주인공이 그들 부부의 선거캠프에 스탭으로 참여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주인공은 애초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에 강박적으로 헌신하는 사람이었다. 옳은 일을 위해 정치적인 희생을 치르기도 했다. 그러다 갑자기 이 유사 클링턴에게 탐닉하기 시작한다. 주인공의 전력을 돌아볼 때 그가 이 후보를 지지한다는 건 일종의 타협이고 절충이다. 그러나 캠프에 참여한 뒤 주인공은 후보의 매력에 완전히 매료당한다. 누군가 주인공에게 캠프에 들어온 이유를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이제는 정도만 고집하지 않는 사람과 함께 일한다는 게 어떤 건지 궁금합니다. (중략) 함께 역사의 주인공이 되고 싶습니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주인공은 그가 사랑하는 후보가 저질러온 온갖 추문을 목격하게 된다. 대부분이 성추문이다(르완스키를 연상시키는 캐릭터도 등장한다). 급기야 미성년자를 임신시키는 일까지 발생한다. 오랜 세월 후보를 따랐던 선거 조사원은 자살한다. 주인공은 참다 못해 캠프를 떠나겠다고 선언한다. 그러자 후보가 말한다. “정치라는 세계를 인정할 수 없는 거야? 여태 겪어 봤으니 알 거 아니야. 야, 링컨이 대통령 되기 전에도 훌륭했겠니? 아마 자기를 알리기 위해 촌스러운 미소를 날리며 다녔을 걸? 기회를 잡아야 권력을 얻을 수 있는 거잖아. 생각해 봐. 정치인들 대다수가 영혼을 팔고 국민을 분열시키고 이용해. 그 가운데 당선확률이 있는 사람이 누군지 생각해 보라고. 누가 나만큼 서민들을 염려하지?”
다음 장면. 백악관에서 축하연이 열리고 있다. 대통령에 당선된 주지사는 아내와 빙글빙글 돌며 춤을 추고 있다. 카메라가 이동하더니 이제 권력의 중심으로 부상할 선거캠프 스탭들의 얼굴을 포착한다. 그 컷의 마지막에 미소 짓고 있는 주인공의 얼굴이 들어온다. 주인공이 말한다. “미스터 프레지던트.” 영화는 이후 펼쳐질 그들의 미국에 대해 서술하지 않는다. 이 영화의 탁월함은 주인공의 선택이 옳았는지에 관한 결론을 강요하는 게 아니라 멀찍이 조망하며 살짝 조소하는 태도로부터 발화되는 것이다. 감독의 초기작 <졸업>의 마지막 장면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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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을 이루기 위해 절충된 현실을 선택하는 행동은 언뜻 실용적으로 보인다. 아니, 많은 경우 실제 실용적이다. 문제는 그렇게 실현된 성공이 이상으로 이어질 수 있느냐는 것이다. 역사를 돌아볼 때, 절충의 과정에서 반영된 이해관계들에 의해 애초의 숭고한 목적은 번번히 좌절되었다. 더불어 급조되었던 연대와 진영은 불신과 자괴감을 반복했다. 우리의 이상은 정권 교체인가, 혹은 더 나은 세상인가. 정권 교체 만으로 더 나은 세상은 이룩되는가. 다시 한 번,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할 것인가. 이 처연한 질문의 두께는 날마다 두터워지고, 나는 갈수록 선택을 독려하기가 조심스럽다.
그러나 적어도 나의 선택에 있어서 만큼은 확신하고 있다. 나는 야권연대라는 신앙을 믿지 않는다. 그 신앙의 이상이 나를 구원해줄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정당투표율 3%를 달성해 원내 진출하는 것이 목적인 정당에 대해 죽은 표를 운운하는 건 흥미로운 발상이다. 내 주머니의 정체성을 명백히 대변하는 동시에 뚜렷한 대북관을 가지고 있는 진보신당을 지지한다. 진보신당은 원내에서 거대 여야 사이의 매우 유의미한 견제세력으로서 기능할 수 있을 것이다.
3. 좋아하는 블로그 하나더
http://seoul.blogspot.com/2012/04/blog-post_12.html?spref=tw
민주당의 한미 FTA 반대가 마치 정책의 핵심 목표처럼 되버린 건 패착이다. 이 시점에서 한미 FTA를 반대한다는 것은 현실성도 없고, 국가 전체를 위한 실체적 이익도 없으며, 절차적으로 너무 복잡하고, 노무현 정부하에서의 정책을 감안한다면 논리적으로도 궁색하다.
정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