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샀다. (정확히는 은행이 사줬고 나는 엄청난 빚쟁이가 되었다!)
처음에 ‘어떤 집을 사고싶은데? 왜 집을 사고 싶은 건데?’ 라고 리얼터가 물어보면 무슨 대답을 해야할 지 몰라 길을 잃은 기분이었다. 그러게. 다운페이먼트 할 돈이 모이면 집 사는 거라고 어른들이 그랬고, 이곳의 말도 안되게 비싼 월세 너무 아깝고, 투자 목적으로는 집 사야된다고들그랬고, 그렇다고 값이 오를 것이나 지금 살기 불편한 곳은 싫고, 내가 살면서 행복하고싶고, 연애할 때는 결혼해서 살 수 있는 곳을 내 취향대로 질러버려야지 했는데 연애도 끝난 마당에 내가 어디서 멀하고 살고 싶은지도 모르겠고, 샌프란시스코 평생 살거냐 집사면 페북 계속 다닐거냐 묻는데 어려운 인생 질문에 대답 할 수가 없어 울고 싶어졌다. 모르겠다고요. 엄마아빠가 물어보면 아 몰라 그래버리는데 집사는 건 내가 나한테 대답하는 거라 도망갈 수도 없고. 내 인생 질문에 내가 대답을 못하는 게 답답해서 죽을 맛.
그러다가 얼떨결에 예쁜 집에 오퍼를 넣어봤는데 덜컥 되버려서 며칠 고민하다 에라 모르겠다하고 슥슥 질러버렸다.
갑자기 어른이 된 기분. 맨날 부동산 사이트를 보고 있고 머릿속에는 집값과 이자율과 관리비와 보험 세금 뿐이고 남들은 무슨 집 사는지 궁금하고 이러다가 자식한테 “니친구는 어느 아파트 단지 사니?” 라고 물어보는 재미없는 으-른이 되어버릴까봐 겁이났다. “니 친구의 취미는 머니? 그 아이는 어떤 점이 매력적이니? 어떤 점이 빛나?” 라고 물어보는 본질을 보는 어른이 히피로 살고 싶은데.
안 그럴려고 적어보는 몇가지 다짐.
결국에 내가 살고 싶은 예쁜 콘도를 질러버린 건 잘했다고 생각한다. 프랙티컬하거나 투자가치가 최고인 건 아니지만 그냥 내가 하루하루 살면서 행복해하면 맨날 집값 들여다보지 않고 집값이 떨어져도 배 안 아플 수 있을 것 같다. 이제 돈돈돈 거리는 거 그만 하고 신경끄고 살아야지. 내가 쓸 물건 산 거라 생각하고 걍 여기서 행복하게 살아야겠다.
그렇다고 집 산 거 때문에 그렇게 ‘더’ 행복한 거 같지는 않다. 돈은 없으면 불행하지만 그 선은 넘었고, 지금 버는 것의 반만 벌어도 나는 지금만큼 행복할 수 있을 거 같다. 내가 이보다 더 비싼 집을 산다고 혹은 이집을 일시불로 잔금을 치룬다고 내 인생이 그렇게 달라질 것 같진 않다. 집 못 사고 계속 월세 내도 인생에 불만은 없었다. 그러니 앞으로 인생결정 내릴 때 돈은 일순위로 두지 말 것. (삼순위 정도 두는 건 현실적일 듯)
그래도 텅 빈 집 내맘대로 하란 건 즐겁다. 가구보고 인테리어 고민하고 인형의 집 꾸미기 리얼 버전. 이 즐거움을 원래 결혼준비 신혼 때 하는 건데 완전 혼자 신났음.
이거 혼자 다해버리면 신혼 때 머하니. 집가진 여자 남자 만나기 더 어려운 거 아냐 라는 반응은 콧방귀 뀌려하지만 솔직히 가끔씩 그런 생각이 들긴 한다. 머 어쩌겠어, 혼자라고 님을 기다리며 아무것도 안하며 맘만 조급한 사람보다 지금 상황에서 최대한 행복한 사람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한다.
아 그리고 내가 변했다는 증거 하나. 집이 생기니 중심추가 생긴 거 같아 좋다. 늘 언제든 샌프란시스코를 떠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떠난다보다) 언제든지 돌아올 수 있다라는 생각이 든다. 늘 내 고향 내 중심은 한국의 가족들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몇년전부터는 서울을 갈 때 내 집이 아니라 친숙한 동네를 방문한 느낌이 든다. 따뜻한 내사람들이 있는 샌프란시스코가 더 집 같다는 생각을 했는데 이곳은 이곳대로 잠깐 머무는 도시라 친구들은 떠나가고 집인가 집이 아닌가 정이 붙을까 말까 그렇게 둥둥 떠 있었다. 집을 사니 직장을 관둬도 쉽게 이곳을 떠나진 않을 거 같다. 그리고 어디를 가도 돌아올 생각을 할 것 같다. 그 제약이 안정감을 준다. 좋다. (20대에는 제약이라는 말만 들어도 숨이 막힐 거 같았는데 )